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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 이상(尹 伊桑) 기념 공원

nimdouckyoung 2011. 5. 31. 05:09

 

윤 이상(尹 伊桑) 기념 공원

 

윤이상 기념공원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터가 있던 통영시 도천동 148번지 일대에 건립되었다

기념공원은 윤이상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

카페와 기념품샾 그리고 로비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가진 에스파체

그리고 각종 공연과 세미나 등 실내행사가 가능한 메모리홀

야외 행사장인 경사광장 등으로 이루어 져있다

 

서양 음악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나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고국인 한국은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순간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


경사광장 무대

 

윤이상 기념공원 연못

 

600석 규모의 야외공연 및 행사 등을 위한 경사광장은 목재로 된 객석이 주는

자유로움과 그리고 개성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공연, 영화상영, 결혼식등 다양한 야외 이벤트가 진행된다

 

"이 집에 윤이상 선생이 살고있다"

윤이상 기념관에 드리는 시 정 일근 쓰다

 

‘현존하는 현대 음악의 5대 거장'으로도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작곡가이나,

정작 그가 태어난 조국인 한국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윤이상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하나 된 조국에 대한 꿈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이야기이다.

윤이상은 1995년 독일의 한 방송사가 뽑은 20세기 백 년을 이끈

세계의 음악가 20인에 선정된 유일한 동양인이다.

 

편 가름도 없고 다툼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 사람들은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은 어울릴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

묵묵히 자신의 음악 세계를 열어 나갔다.

 

서양 음악으로 동양의 소리를 훌륭하게 표현해,

현대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방향을 찾아 헤매던 서양 현대 음악계는 윤이상 음악에서 새로운 방향을 보았다.

윤이상 기념관 입구

 

어린시절의 음악적 영감

 

윤이상 선생의 유품

동양과 서양, 남과 북의 다리가 되고자 했던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

 

윤이상 선생의 유품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윤이상은 마흔이 되던 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이상에게 음악가로서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것은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제에서 초연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다.

이 곡은 동양의 음을 서양 현대 음악으로 완벽하게 조화시킨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윤이상은 그 후에도 「바라」 「오 연꽃 속의 진주여!」 「예악」 등을

발표해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한국은 윤이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윤이상은 조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특히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작곡가는 예술가이자 세계 속의 한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일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것이 윤이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하면 할수록 한국으로 돌아갈 길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의 마지막 꿈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조상님들 무덤에 술 한 잔 올리고 고향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눈을 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이상은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윤이상의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어디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는 뜻이다.

윤이상 선생의 삷을 이야기하는 기념공원 관장 윤건호

 

통영을 가슴에 품고 세계로 비상한 작곡가


세계적인 음악가와 학자들이 발 벗고 구명운동에 나선 결과,

1969년 윤이상은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제 윤이상에게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었고,

아무리 윤이상이 해외에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이름을 떨쳐도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려야 했다.

 

그는 피리는 오보에, 가야금은 하프, 해금은 바이올린을 대신하게 하는 등

한국 전통 악기의 음색을 서양 악기로 옮기려고 했다.

또한 음을 떨리고 미끄러지고 끌어올려지게 하는 등 전통 음악의 기법을 시험하곤 했다.

윤이상은 통영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대부분을 통영에서 보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어부들의 노랫소리는 윤이상 음악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4년 한국 음악계가 대대적으로 윤이상 음악축제를 기획하면서

윤이상의 귀국을 준비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윤이상은 독일로 돌아가 생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한다.

혼신을 다해 쓴 마지막 작품은 「화염 속의 천사」와 「에필로그」였다.

 

몸은 비록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 갇혀 있지는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작곡을 했고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하게 된다.

세계 어디에서나 존경과 환호를 받았던 윤이상이었지만,

오직 조국인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967년 일어났던 동베를린 사건 때문이다.

 

동베를린 사건은 한국 정부가 윤이상을 포함한 해외 동포들이

동베를린을 통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죄를 씌워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사건이다.

윤이상은 억울하게 끌려와 고된 옥살이를 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2010년 3월, 2010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렸다.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열린 음악제이다.

윤이상과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올해도 통영 하늘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울 것이다.

2011년 봄, 인간 윤이상을 되돌아보기 좋은 때가 아닌가 싶다.

 

「나비의 꿈」은 경계를 넘나드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음악을 통해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 남한과 북한의 편 가름도 다툼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윤이상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키우는 작은 씨앗이 되길 바란다.

 

세상 사람들은 말했다. 남한과 북한은 화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윤이상은 남과 북은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 속에 남과 북의 화해를 담고 전쟁을 반대하는 소리를 담고

평화를 바라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나갔다.

남과 북이 음악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남북통일음악제도 열었다.

윤이상은 편 가름도 없고 다툼도 없는 세상을 꿈꾸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숱한 고난이 와도 간절한 꿈을 향해 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제작해 기증한 윤이상 흉상과 석송

 

<다음에서 검색한 글입니다>

 

나그네

- 박목월 詩 윤이상 曲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출처 : 반디불이 사랑
글쓴이 : 석송부산갈매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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