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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녀가 잠든 곳, 원수의 무덤에서 40리 언덕

nimdouckyoung 2017. 2. 24. 20:53

 

봉선사 부도밭의 비밀과 남양주 사릉(思陵)

조카 죽이고 권력 오른 세조
남양주 운악산에 자기 묏자리 미리 봐둬
"국왕 방문 기다렸다"는 용한 지관 시켰다는 전설

광릉 원찰 봉선사에는 천재 문인이자 친일파 춘원 이광수 기념비
유신 시대 중정 부장, 이후락 가족 공덕비도

노비로 전락한 단종 왕비
정순왕후는 여든한 살까지 살며
원수들의 역사 지켜보고 광릉에서 15㎞ 사릉에 묻혀

이광수 살던 집터는 초라하기 짝이 없고
폭군이라 낙인찍힌 광해군묘도 을씨년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왕비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 광릉 옆에는 고찰이 하나 있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남편을 위해 중창한 원찰이다. 이름은 봉선사다. 그 초입 오른편을 보면 비석군이 나온다. 역대 주지스님 부도비, 봉선사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기리는 공덕비도 서 있다. 비석들 가운데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춘원 이광수. 한국 근대문학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큰 산이다. 동시에 그 산만 바라보고 감탄만 하기에는 굉장한 문제적 인물이다.

그 옆에 있는 비석은 1972년 봉선사를 대규모로 확장할 때 공덕을 세운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세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문수행, 이월파, 정보현행' 세 사람이다. 누군지 말하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인사 가족들이다. 1971년 대통령선거 패배 후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이 "박정희가 아니라 그자에게 졌다"고 개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조금 떨어진 옆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운허 스님 추모비가 서 있다. 인연 멀기로는 몇 광년쯤 아득한 세 존재를 알리는 상징이 어깨를 맞대고 햇살을 받는다. 자, 우선 세조 이야기다.

세조와 광릉

 

 

봉선사 초입에 있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
봉선사 초입에 있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

 

조카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68년 재위 13년 만에 죽었다. 그 13년 권력을 위해 빼앗은 목숨이 너무 많았다. 죽을 때까지 피부병을 앓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불교 서적을 편찬해 업보를 씻으려고도 했다. 남양주 땅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렇다.

세조는 풍수에 능하였다. 하루는 자기 묻힐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 아주 흉한 땅에 아비를 묻는 사람들을 보았다. 근처에 있는 길지를 일러주고 떠나려 하니, 행색이 이장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여 주머니에서 300냥을 꺼내 이들에게 주곤 묏자리를 잡아줬다는 지관을 물어 찾아갔다. 첩첩산중에 옷도 없이 사는 자였다. 흉지(凶地)를 점지한 연유를 물으니 이리 대답하였다. "대대로 발복할 길지가 그 옆에 있었으나 사는 꼴이 너무 궁색한지라 당장 300냥을 벌 자리를 잡아주었소." 감탄한 세조가 또 물었다. "그런 용한 지관이 왜 이리 옹색하게 살고 있는가." 기다렸다는 듯 지관이 의복을 차려입고서 마당으로 나아가 절을 하며 이리 말했다. "국왕이 찾아올 땅이라 이렇게 기다렸나이다." 그리하여 세조가 그 지관에게 명하여 자기 묻힐 자리를 찾게 하니 그곳이 남양주 운악산 기슭에 있는 광릉이다.

세조는 능을 검소하게 쓰라 유언을 하고 죽었다. 능 자체는 별다른 장식 없이 검약하지만, 속칭 '무늬만 검약하다.' 묏자리가 정해진 뒤 사방 15리, 자그마치 3600헥타르(1089만 평)에 달하는 땅에 농사가 금지되고 민간 마을이 철거됐다. 일제강점기에도 건드리지 못한 신성한 그 땅이 바로 대한민국 국립수목원이다.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수양대군에게 시집갈 때 열한 살 소녀였던 윤씨였지만, 1453년 음력 10월 10일 남편이 졸개들을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급습할 때 갑옷을 입혀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남양주 사릉 지도

 

 

1468년 세조가 죽었다. 정희왕후 윤씨가 권력을 쥐었다. 열아홉 살에 즉위한 둘째아들 예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그가 요절하자 바로 그날 열세 살짜리 손자 성종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7년 동안 섭정을 했다. 그녀가 1483년 죽자 남편이 잠든 광릉에 미리 마련된 한쪽 언덕에 묻혔다.

그 왕릉을 가본다. 겨울에도 피톤치드가 느껴지는 송림 한가운데에 그녀가 묻혀 있다. 홍살문 뒤로 정자각 하나가 서 있고 왼쪽 언덕에 세조가, 오른쪽 언덕에 왕후가 누워 있다. 왕후 잠자리가 더 높다. 세상은 승자(勝者) 독식이니 이 얼마나 무서운가.

또 다른 그녀의 무덤, 사릉(思陵)

윤사로라는 자가 있었다. 단종 즉위 때부터 왕릉을 지키는 수릉관에 임명돼 계절마다 단종으로부터 옷을 하사받던 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1457년 음력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죽고 사흘 뒤 윤사로가 이렇게 주장했다. "(역신들의) 딸들은 공신에게 주어야 한다. 나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원한다."

윤사로가 탐한 송현수의 딸이 바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다. 사관이 이렇게 썼다. "성질이 잘고 남의 재물을 빼앗는 자였다." 다른 여자의 남편에 의해 자기 남편을 잃은 여자, 정순왕후 송씨는 광릉에서 15㎞ 거리 언덕에 묻혀 있다. 사릉(思陵)이다.

 

왕후에서 노비로 추락한 송씨는 양반집 출가 여인들이 살던 서울 동대문 정업원에 얹혀살았다. 왕실에서 주는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고 동냥질과 염색질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염치는 있었던 세조는 노비라도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명했다). 그녀가 울면 동네 아낙들이 같이 울었다. 아낙들은 금남(禁男)의 야채 시장을 열어 송씨에게 몰래 먹을 걸 조달했다.

왕과는 불과 3년 함께 살았지만, 왕후는 모질고 파란만장하고 오래 살았다. 원수 세조가 죽고 시사촌인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았다. 세조 앞잡이로 나섰던 모사꾼 한명회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당하는 꼴도 보았다. 그리고 중종 11년(1516년) 영월에 있던 남편 묘에 봉분이 세워지고 제사가 치러졌다. 남편 사후 59년 만이었다. 그 모든 역사적 풍경을 낱낱이 지켜보고서 5년 뒤 그녀가 죽었다. 여든한 살이었다.

 

사릉 뒤편 산자락에 숨어 있는 광해군 부부 묘.
사릉 뒤편 산자락에 숨어 있는 광해군 부부 묘.

 

자식 없이 죽은 그녀를 위해 단종의 누나인 경혜옹주가 자기 시댁인 해주 정씨 선산에 그녀를 묻었다.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녀 또한 복위됐고, 무덤 또한 왕릉으로 격상돼 사릉(思陵)이라 호칭됐다. 사릉으로 가본다.

마침 꾸물꾸물한 먹구름이 걷히더니 빛줄기가 내려왔다. 송림 한쪽에 사돈댁에 유택(幽宅)을 내준 선한 해주 정씨네 무덤들이 보였다. 사릉은 남향이다. 남편이 잠든 영월 장릉은 동쪽이다. 퍽이나 안쓰러운 이 풍경에, 1999년 남양주시에서 사릉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 앞으로 옮겨 심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정령송(精靈松)이라 한다. 이 나무 또한 굳게 자라지 못하고 야위어 있으니, 생전에 겪은 고초에 영혼이 지쳐버린 게 아니었을까. 전국에 있는 왕릉 송림에 소나무를 공급하는 양묘장도 이곳 사릉에 있다.

독립운동가 운허와 봉선사 부도밭

평북 정주 출신인 운허(耘虛) 스님(1892 ~1980)은 젊은 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승려가 된 뒤에도 1930년대 만주 독립운동단체 조선혁명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해방이 되고, 봉선사에 있을 때 광동중학교를 세우고 불경 한글화에도 진력했다. 속명은 이학수다.

운허 스님, 이학수의 동갑내기 6촌 형이 춘원 이광수다. 조선이 광복을 맞이할 무렵 이광수는 사릉에서 길 건너 사릉천변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이광수는 1945년 8월 16일 천변을 산책하다 광복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운허였다.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해방되던 해까지 여기저기 친일 행각을 벌이던 춘원이었다.

갈 곳 사라져버린 이 변절한 천재에게 봉선사 경내에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집을 내준 이도 운허였다. 머리는 비상하되 유약한 동갑내기 형을 위해 독립투사 승려가 공간을 내준 것이다. 그 집에서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이 나왔다. 1975년 이 독립투사는 친일파로 낙인찍힌 천재 문인을 위해 절 한편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 옆에 있는 비석 이름은 중창대시주 공덕비다. 비석에 나오는 인물 '이월파(李月波)'는 유신 초기 중앙정보부장 이후락(1924~2009)이다. 1972년 당시 무소불위였던 월파거사 이후락과 그 가족이 봉선사 중창에 큰돈을 댄 공덕을 알리는 비다. '大' 자가 붙었으니 그 시주가 어마어마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턱이 없다.

춘원의 집터, 사능리 143-2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이광수는 조선이 낳은 3대 천재라고 불렸다. 함께 동경에서 유학하며 꿈을 키웠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반민족 변절자로 돌아섰다. 홍명희는 사회주의를 택해 북으로 가버렸다. '나의 고백'에서 이광수는 친일 행각을 이렇게 해명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라고.

 

 천재 문인이요 친일파인 문제적 인간, 춘원 이광수의 사릉 집터.
천재 문인이요 친일파인 문제적 인간, 춘원 이광수의 사릉 집터.

 

이 천재 문인의 집터는 사능리 143-2에 있다. 비닐하우스와 창고 틈바구니에 잔디밭이 있고 그 위에 민간단체가 만든 표석 몇 개가 앉아 있다. 그 뒤에 있는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주민에 따르면, "그 옛날 그대로"라고 했다. 이광수를 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한국 근대문학사이거늘, 집터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집터에서 사릉을 넘어 산속으로 가면 광해군묘가 나온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무덤이다. 역시 초라하지만 훗날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뀌면, 정순왕후의 무덤이 왕릉이 되었듯, 이 또한 바뀌리라.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내친김에 상상해본다. 춘원이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위대한 문학가요 민족운동가로 남았더라면 저 집터는 지금 어찌되었을까. 남양주에서 마주친 흔적들 앞에서 심정이 복잡하였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출처 : 아름다운 인연 ♣ 피천득님
글쓴이 : 인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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