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시조(古詩調)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해야 박주산챌 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한 호)
- 이해와 풀이 -
짚방석 꺼내 올 것 없다. 낙엽 쌓인 위에는 못 앉겠는가. 솔불(일명 "관솔"이라고 함)켜지 마라. 어제 진달이 이제 곧 떠오를 것이다. 아이야, 잘 익은 술에 고기 안주 아닌 변변치 못한 산나물 안주만으로도 흡족하니 주저 말고 내어 오너라.
* 관솔: 소나무의 송진이 가장 많이 엉긴 가지가 뻗어 나간 단단한 옹이를 말한다. 전기가 보급되지 않는 시골에서 해가 지고 어두워 지면 바깥마당에서 관솔불을 켜고 농사지은 곡식 타작도 하고 음식도 장만하였다. * 박주산채(薄酒山菜): 맛이 변변치 못한 술과 산나물. 이 시조에서는 남에게 대접하는 술과 안주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 봄
- 작가 소개와 감상 -
지은이 한호(韓濩: 1543~1605)는 그의 호 석봉(石峰)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의 명필로 어려서 부터 어머니가 석봉의 교육을 위해 떡을 썰면서 격려하였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였다. '한 호'는 중국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온 종래의 서풍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경지를 확립해 그 이름을 드날렸다. 강건하고 호쾌한 필체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근세조선의 쌍벽을 이룬 서예의 대가였다. 이 시조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풍속이 시원하게 우러나 보이며 작가의 안분지족(安分知足) 즉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절로 만족할 줄 여유가 돋보인다. 시조 전체에서 풍기는 맛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면서 당시 순박한 농촌생활의 서정(序情)의 극치를 보여준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남 구 만>
- 시조(詩調) 풀이 -
동쪽 창문은 해가 떠 밝았는데 종달새 울어댄다. 소 기르는 아이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산 너머에 있는 큰 밭을 언제 갈려고 그러느냐.
* 작가 소개와 감상
지은이 남구만(南九萬)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문장과 서화에 뛰어난 인물 이였다. 당시 서인(西人)의 중심인물 이였으나 당파조직, 당쟁을 싫어했고 법(法) 앞에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공의(公義)로운 인물 이였다. 공평무사하고 도량이 있어 그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는 제자가 수백 명이 되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전해오고 있다.
시조 내용도 일방적인 교훈이나 훈계가 아니라 상대와 주고받는 질의 방식으로 짜여 져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유도 하는 형식을 취했다. 늦잠 자는 아이를 소리쳐 깨우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짜증나지 스스로 일어나게끔 만드는 계몽시조(啓蒙詩調)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조가 우리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고 있음은 문답형식의 시어(詩語)를 통해 젊은이 스스로가 부지런함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음으로 보고 있다.
- 위 사진 설명 - 시조 작가 남구만(南九萬)이 1689년에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심곡마을)에서 유배생활 중에 농촌의 봄철 풍경을 노래한 "동창이 밝았느냐"----- 가 창작된 곳이다. 그의 깊은 학문과 고매한 인격을 기리고자 이 고장의 뜻있는 이들에 의해 1994년에 시조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간밤에 부던 바람 만정도화(滿庭挑花) 다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쓰로려 하는 괴야 낙화(落花)인들 꽃이 아니랴 쓸지 만들 어떠리
- 작자 미상 -
- 시조풀이 -
지난밤 불던 바람이 복사꽃 잎을 마당 가득히 떨어지게 하였도다. 아이는 비를 들고 마당에 흩어진 꽃잎을 쓸으려 하는구나. 떨어진 꽃도 꽃인데 쓸지 않고 그냥 둔들 어떠리.
- 시조 감상 -
어제까지 활짝 펴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복사꽃이 땅에 떨어졌다고 금세 쓰레기 취급을 해서 쓸어 내려 하는 인간의 단순한 마음을 살짝 꾸짖고 있다. 마당에 떨어진 꽃잎도 꽃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너그럽고 그윽한 마음이 잘 스며 나오는 시조로 볼 수 있다. 쉽게 좋아하고 쉽게 싫증을 내는 경솔함은 결코 좋지 않다는 교훈과, 자연을 굳이 고정관념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려는 마음은 너무 각박하지 않을까하는 여유와 정서의 메마름을 아쉬워하는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샛별 지자 종달이 떳다 호미 메고 사립나니 긴 수풀 찬 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는다. 아이야 시절이 좋을 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
< 이 재 >
- 시조해설 -
샛별(금성"金星": 새벽별)지자 종달새가 날아오른다. 호미 메고(들고) 사립문(싸리나무로 엮은 농촌집의 대문짝)열고 나가니 우거진 수풀에 맺힌 찬 이슬에 베로 지은 홑바지가 다 젖는다. 아이야(아!), 시절이 좋을 진데 베옷 정도 젖는 것쯤이야 무슨 문제가 되랴.
- 시조감상 -
농사 잘되고 평화로우며 안락한 생활에서 아침 일찍 종달새의 노랫소리에 맞춰 밭으로 나가는 행복이 있는 한 홑바지보다 더한 비단옷이 젖어도 좋다고 노래한 시조이다.
지은이 이재(李在)는 조선시대 영조 때 가인(歌人)으로 글씨에도 뛰어난 인물이다. 이외에도 그의 시조는 모두 농촌을 사랑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손에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는구나
<우 탁>
- 이해와 감상 -
우 탁(禹 倬)의 탄로가 2 수 가운데 한수이며 작자는 덧없는 세월 속에서 늙어만 가는 본인의 모습을 보고 시조 초. 중장에서는 체념과 탄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종장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늙어감"이며 후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다는 인생무상을 받아들이는 달관의 경지를 엿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세월(늙는 길)과 늙음(백발)을 구상화(具象化)한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늙음과 죽음의 안타까운 심정을 간결하고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춘산(春山)에 눈 노긴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머리위에 불리고져 귀 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 탁>
- 전문 풀이 -
봄 동산에 쌓인 눈을 녹이고 새싹을 움트게 하는 봄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곳이 없다. 그 봄바람을 잠시 동안 빌어다가 늙은이 머리위에도 붙게 하고 싶다. 그리하여 오래된 백발을 눈 녹이듯 없앴으면 좋겠다.
- 이해와 감상 -
이 탄로 가는 작자가 노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은거 할 때에 지은 작품이다. 주제는 세월이 흘러 사람이 늙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헛된 노욕(老慾)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를 드러내고 있다. 늙음은 그 어떤 것보다 생명의 시들어 감을 보게 하는 것이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시조는 자신의 백발을 보고 다시 검어 지고 싶은 의욕을 노래하고 있으며, 인생(人生)의 허무함을 봄바람을 빌어다가 녹이겠다는 표현은 꾸밈이 없고, 종장에서는 인생의 무상함을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 들리는 소박함이 엿 보인다.
* 황진이(黃眞伊)의 소개

그는 조선시대 성종과 중종 때의 명기(名妓)로 황해도 개성의 황(黃)모라는 진사의 서출(庶出)인 것을 빼고는 나무랄 때 없는 여성이였다.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실로 훌륭한 스승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 할뿐 아니라 사제지간의 엄연한 한계선을 뚜렷하게 지켜야 하는 당시의 사회적 윤리도덕을 뛰어넘어 스승인 서경덕으로 하여금 연정의 싹을 틔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절세가인이 바로 황진이였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황진이가 서경덕을 연모하였으나 서경덕은 황진이를 향한 흠모의 정을 내면으로만 불 태웠을 뿐 스승으로서 고고한 자세를 지켜 대학자답게 유혹을 뿌리치는 고통을 참아 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정설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두 사람의 '시조작품'을 통해 유추해 보면 그들이 서로 애틋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겠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일반인과 달리 시와 글(문장), 그림에 능하여 예술적 차원의 높은 경지를 통하여 그들의 사랑을 구축. 승화시킨 시조 두 편을 소개하여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비 구비 펴리라
(황 진 이)
- 시조풀이 -
일 년 중 가장 길다는 동짓달 밤이지만 임께 드릴 그 수많은 사랑의 밀담을 나누기엔 너무 짧아 거두절미하고 가운데 부분만이라도 뚝 잘라 달콤하고 향기로운 봄바람 이는 이불 속에 줄줄이 가득 챙겨 두었다가 어른님(스승인. 서경덕) 오는 날 밤 만리장성같이 긴 정담을 나누며 모든 것을 바쳐 회포를 풀어 보리라.
- 시조감상 -
작가인 황진이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그에게는 첫 이성인만큼 단순히 스승과 제자지간이라 하기엔 서경덕의 존재는 너무나도 큰 그늘로 와 닿았다. 그저 무덤덤하고 엄격한 관계만을 유지해 가기에는 두 남녀 모두 출중한 점이 많아 서로에게 이끌리는 감정 또한 각별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남녀 문제를 차원 높게 암시할 뿐 아니라 요즘 시대어로 고감도 통함(텔레파시)이 오가고 있다는 점이 두 사람의 시조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사랑과 그리운 정은 보통 사람 이상으로 빠르게 교감되었을 것임을 후일 독자들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 시조풀이 -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이 다 그렇다. 구름이 겹겹이 뒤덮은 깊은 산중에 그 누가 올까마는 가을되어 낙엽지고 바람이 부니 행여 그대(진이)가 찾아오는 기척인가 싶구나.
- 시조감상 -
이 시조에서 서경덕은 황진이가 글을 배우러 올 시간이 되어도 이내 나타나지 않자 붓을 들고 설레 임을 진정시키면서 계절에 은유하여 노래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한 것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갖고 있는 이성에 대한 감정이다. 우리 인간이 지향하고자 하는 최대의 내면적 목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기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정서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젊은이의 사랑은 이성(理性)보다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쉽고, 중년의 사랑은 완숙하며 그윽하고 진지하며, 노년의 사랑은 아름다운 이성을 완상하는 기쁨일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의 사랑이었든 때로는 이러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어 당사자들은 갈등하고 괴로운 시련을 겪게 된다. 그래서 황진이의 스승인 서경덕도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부질없는 허황된 꿈같은 사랑의 감정을 애써 지워버리고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근엄하고도 의연한 자세로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느냐 내 늙을 적이면 넨들 아니 늙을 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가 하노라
서 경 덕
- 시조풀이 -
마음아 너는 어찌하여 매사에 젊은이 같기만 하는지 내(몸이)가 늙을 때 너(마음)도 늙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부질없이 젊은 기분 내고 따라다니다가 남의 조롱받고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노라.
지금까지 서경덕은 자신도 마음을 가다듬기 어려울 만큼 황진이를 연모하였지만 그 열병은 일장춘몽으로 그치고 황진이와의 고결한 사랑 그 자체로 은근히 남겨두고 싶을 뿐 결코 섣부른 행동으로 타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경계하며, 자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잡아 가는 노력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시조라고 볼 수 있다.
* 황진이는 스승인 서경덕을 능가할 만큼 시(詩), 서(書). 화(畵)에 빼어났고 특히 시와 그림 솜씨는 누구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훌륭하였다. 최소한 시조 창작에 있어서는 제자인 황진이가 스승보다 앞서고 있어 가히 출람(出藍)의 경지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황진이는 겸손하게 "송도삼절"의 제1인자를 스승인 서경덕으로 칭했고 제2는 자신이며 제3은 박연폭포라고 말했던 것이다. 어떻든 섬광처럼 번뜩이는 황진이의 총명한 재주는 그 누구도 추종을 허락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경애하는 화담(서경덕의 호)으로 부터 수학을 끝내고 궁중의 교방(敎坊)에서 명석함과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최고의 동기(童妓)로 출발하여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스승 서화담을 첫사랑으로 간직한 황진이는 그 어느 남성이든 마음에 어필해 오면 서화담이란 모델을 통하여 이해하려했을 것이다. 황진이를 면앙정 송순(宋純)과 더불어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최고봉의 위치에 까지 올려놓은 것은 그의 시조 6수를 통해서 알 수 있음은 물론 여러 가지 일화에서 보듯 그녀는 재능과 인품이 뛰어난 선비와의 교분만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녀로서 전성기에 접어든 때, 벽계수(碧溪守)라는 왕손(王孫)이 황진이를 한번 보고자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나 서화담에 필적할 만한 명사가 아니면 친교를 시도 하지 않았기에 벽계수는 마침내 이 달(李達)에게 긴밀히 부탁하여 황진이의 관심을 모으는 방법을 알아 행동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벽계수는 이달이 알려준 정보에 따라 황진이 집 근처에 있는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신 뒤 명사연하며 가야금으로 노래 한곡을 연주하고 나귀를 타고 짐짓 떠나는 척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본 황진이는 급히 금동(琴童)에게 물어 명사의 이름이 벽계수임을 알고 유명한 "청산리 벽계수 야"란 시(詩)를 읊는다.
청산리 벽계수(碧溪守)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왜라.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 진 이)
푸른 산 골짜기에 맑게 흐르는 시냇물아, 빨리 흘러감을 뽐내지 마라. 일단 바다로 흘러가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빛이 산속을 가득히 비추니 쉬엄쉬엄 흘러감이 어떻겠는가
- 시조 감상 -
여기에서 황진이 자신이 기명(妓名)인 명월(明月)이 밝히는 곳이 산속이란 공간 개념과 벽계수(碧溪守)의 수(守)를 같은 음을 가진 물수(水)로 대신하여 맑게 흐르는 산속 계곡 물과의 조화를 꾀한 재치는 영특한 기교를 보인 부분이다. 그런데 이 기막히게 절묘한 시를 �조리는 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뜨인 벽계수는 황망히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다리 난간에서 중심을 잃고 말 위에서 떨어지는 봉변을 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한 황진이는 즉시 뒤따라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이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같이 빼어난 시를 읊어 사랑을 나타낼 만큼 벽계수에 대한 기대가 컸던 황진이는 공허하고도 허탈한 심정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다시 붓을 들어 이루지 못한 남녀의 정(情)을 노래하였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로다.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황 진 이)
- 전문풀이 -
청산은 나의(황진이)의 마음이요, 흘러가는 푸른 물(녹수)은 님(벽계수)의 정이로다. 푸른 물(벽계수)이 흘러간다고 청산(황진이 마음)조차 변하겠는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면서 가는구나.
- 황진이가 서화담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조(詩調) -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다와 가고 아니 오노매라
- 시조 감상 -
이 시조는 단순한 자연인 산과 물의 대조를 통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변함이 없는 산과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과의 대조, 흐르는 물과 사라지는 인간과의 대조를 통하여 인생에 대한 허망함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 황진이의 시상(詩想)은 철학적 사상을 넘어선 최고의 문학적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고려말 쿠데타를 주도한 이방원(李芳遠)과 이에 맞선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그의 노모(老母), 세 사람이 주고 받은 옛시조 세 편을 소개하여 보겠습니다.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던 세자 일행을 맞아 마중겸 사냥을 나갔던 이성계가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말(馬)에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려고 집을 나서면서 노모에게 인사를 올리니 노모는 지난밤의 흉몽을 들어 이성계 일파에게 변을 당할지 모르니 병문안을 차후로 미루도록 아들에게 간곡히 권고하며 이 시(詩)를 지었다고 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좋이 시슨 몸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같이 시커먼 마음으로 정권을 찬탈하려는 이성계 반도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곳에 깨끗하게 수양된 선비요 충신인 아들 정몽주가 뛰어들면 위태롭다는 뜻을 까마귀와 백로에 비유한 시조이다. - 노모의 간곡한 만류에도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病) 문안을 하려 집을 나셨다. 당시 백성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명현(明賢)이므로 섣불리 위해를 도모해서는 자칫 역적의 오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방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정몽주의 마음을 돌려 대세에 따라와 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병문안 온 그를 정중히 대접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신진 정객들과 대동 융합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지 넌저시 떠보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같이 누리리라
(이 방 원)
- 시조 풀이 -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랴. 개성 만수산 기슭의 칡덩굴이 뒤얽혀지듯 각단을 차리지 말고 새 왕조에 협조한들 누가 뭐라 하랴. 우리도 서로 얽크러져 새 왕조 창업에 혼신을 다하여 영화를 누리며 오래 오래 함께 살아 보리라.
-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정몽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원의 술잔을 받으며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단심가(丹心歌)로써 즉시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정 몽 주)
- 시조 풀이 -
죽고 또 죽고 거듭해서 수없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백골이 흙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넋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오직 고려 충신의 붉다 못해 뜨거운 한 조각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 정 몽 주(鄭 夢 周) 의 최후 -
즉석에서 매우 단호하게 이방원의 제의를 뿌리치는 냉혹한 결심을 나타 내고 자리에 일어나 귀가 길에 올랐다.이 시조로 보아 정몽주의 충절에 추호의 변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 이방원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최후 최강의 걸림돌인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방원은 여진족으로 북청에서 따라온 이지란(李之蘭)을 불러 정몽주 제거 계획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지란은 정몽주의 사람됨으로 볼때 너무 아까운 인물이라며 이방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로 하여금 선지교(選地橋)에서 기다렸다가 철퇴로 살해토록 지시하였다. 그후 선지교에서는 정몽주의 애절한 충절을 대변이라도 하듯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때부터 선지교를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피살 당시 흘린 다리 난간에 흘린 피가 사람 인(人)자로 꿈틀거리며 흘러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음은 물론 선죽교 밑으로 흐르는 개울가에는 정몽주의 노모를 위해 세운 비각이 있는데, 오석으로 된 비석은 늘 물기를 머금고 있어 자식의 죽음을 원통해 하고 있는 어머니의 낙루(落淚)라고 전해 오고 있다.
- 정 몽 주 (鄭 夢 周)의 충절이 주는 교훈 -.
당시 이성계로 부터 왕권 찬탈이 시작되어 정몽주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인 것을 알면서도 그 절대절명의 위험으로 부터 도피하지 않고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운명을 기꺼히 받아들인 정몽주의 용기와 우국충절은 참으로 놀라우며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한순간 마음을 바꾸기에 따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장기간 집권을 누리게 됨은 물론 당대의 부귀영화와 정치생명의 연장이 가능했음에도 정몽주는 그러한 혼란기의 기회주의적 처세를 과감히 뿌리치고 꿋꿋이 절개를 지키며 한 길 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유혹이나 권좌의 미련은 마약과 같아서 결국에는 자아를 파괴하고 파탄지경에 이르고 만다는 결과는 인류사 수천 년을 통해 역사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아 보는 이 있을 것이니 흙인 듯이 있거라
(윤 두 서)
- 시조 풀이 -
값진 옥에 흙이 묻어 추하게 길다닥에 버려져 있으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흙으로만 보는구나. 그대로 두어라. 때가 되면 그것이 옥인 줄 알아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불평하지 말고 흙인 양 조용히 있거라.
- 시조 감상 - 작가 윤 두 서(尹 斗 緖 : 1668 ~ 1715)는 문인이며 화가로서 호는 공제(恭齊)이며 고산(孤山) 윤 선 도(尹 善 道)의 증손이다. 송강(松江) 정 철(鄭 澈)과 함께 시가(詩歌)에 쌍벽을 이루었다. 위의 "옥에 흙이 묻어"의 시조는 윤 두 서의 유일한 '시조작품'으로서 인간들의 자기 수양의 필요성을 깨쳐 주는 시조(詩調)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선비이며 화가였다. 동식물. 인물화에 뛰어나 조선의 삼재(三齋)라 불리운다. 그림의 삼재는 정 선(鄭 敾 :호,謙齋). 심사정(沈師正:호, 玄齋). 조영석(趙榮석:觀我齋)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 윤두서를 포함해 '四 齋'라 부르기도 한다. 모두 숙종조(1674~1720)에 활동한 화가들이다. 네 인물중 누구를 삼재(三齋)에서 제외되어야 하는지는 현재로는 알길이 없다. 작가(윤두서)는 조선 후기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을 포기한 채 전남 해남, 연동(蓮洞)에서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면서 이 시조를 통해서 말한 바대로 옥에 흙이 묻어 침묵하듯이 자신의 명성이나 능력이 '삼 재'에 낄 수 있던 없던 또 '삼 재' 이상의 경지에 도달되었거나 말거나 그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다만, 그 존재 가치를 언제 누가 발견해 주어도 좋고 영원히 땅속에 묻힌 옥 처럼 감추어진 가치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마지막 싯귀가 말해 주듯이 지은이의 여유로운 삶의 철학에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프러 나를 주오 나는 �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어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정 철)
- 시조 풀이 -
길가는 노인분이 머리에는 짐을 이고 등에는 짊어졌으니 그 짐을 풀어서 나에게 주시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웁겠는가? 늙는 것도 서럽다 하거든 무거운 짐까지 지시겠는가?
- 시조 감상 -
위 시조는 "훈민가(訓民歌)" 16수 중에 젊은이는 노인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는 글이다. 작가 송강(松江) '정 철(鄭 澈)' 이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원도 백성을 교화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 노래는 윤리. 도덕의 실천궁행을 목적으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어떤가? 어딜 가나 웃어른 대접을 받기는 커녕 오히러 봉변이나 당하지 않으면 그날 일진이 좋았다고 노인분들은 한숨을 놓는다. 오갈 데 마땅치 않아 허탈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보통 사람들의 노년기를 어디 요즘 젊은이들이라고 건너뛸 묘책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이 젊었다고 하여 노인들을 멸시하거나 푸대접한다면 그건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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