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와 말[馬]
시와 말[馬]
한 마리의 말이 있다.
영양 실조에라도 걸린 듯한 수척한 말이다.
윤기를 잃은 털은 듬성듬성 빠진 곳도 있다.
그러나 한때는 준마였는지 드러나 보인 뼈대가 귀골스럽고 눈빛은 아직도 맑다.
고삐도 없는 이 한 필의 말이 광야에서 외롭게 풀을 뜯고 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마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라한 행색의 한 나그네가 지나다가 말 옆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 나그네 역시 말처럼 수척하다. 먼길을 걸어온 듯 옷은 찌들고 신발은 헐었다.
그러나 동안(童顔)의 얼굴은 맑고 안광(眼光)은 반짝인다.
어느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 것도 같다.
그 나그네는 한참을 서서 말을 바라보다가 곁으로 다가선다.
말은 처음 본 이 나그네가 두렵지도 않은지 피하려는 기색이 없다.
나그네는 말의 등을 쓸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만져보기도 한다. 그
러자 말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싫지 않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인다.
이렇게 해서 나그네와 말은 가까워진다.
나그네는 멀고 외로운 길을 가는데 말과 더불어 동행한다면 심심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궁리 끝에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말의 고삐를 만든다.
한 손으론 흘러내리려는 바지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론 말의 고삐를 끌면서 길을 간다.
그러나 말은 생각처럼 쉽게 따라와 주지 않는다.
먹이를 보면 먹이 쪽으로 달려가려 하고 개울을 만나면 쉽게 건너려 하지 않는다.
이놈을 몰고 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심심풀이로 생각해서 끌고 왔던 이놈이 보통의 짐이 된 게 아니다.
마치 말의 종처럼 나그네는 말에 끌려간다.
그렇다고 안쓰러운 마음 때문에 그냥 내버리고 갈 수도 없다.
나그네의 가슴속에 이미 정이 배어들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말을 억지로 끌고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말을 길들이기로 작정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말에 매달려 놈을 돌본다.
말과 함께 뒹굴고 말과 함께 잠자면서 말의 동무가 된다.
나그네는 그가 가던 길을 잠시 잊고 마치 말이 길인 것처럼 말 속에 빠진다.
이제 그와 말은 하나가 된다.
그는 말의 고삐를 풀어 다시 자신의 허리띠로 맨다.
이제는 고삐를 끌지 않아도 말이 그를 따른다.
나그네와 말은 친구처럼 나란히 걷는다.
말은 이미 나그네의 마음을 알아 멈추고자 할 때 멈추고 움직이고자 할 때 움직인다.
그야말로 동행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 흐린 날씨에 길은 거칠다.
얼마나 걸어왔던가 목은 마르고 다리는 팍팍하다. 그때 말이 조용히 속삭인다.
“주인님, 제 등에 올라타세요.”
나그네는 한참 망설이다가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가만히 말의 등에 오른다.
그러자, 아, 새롭게 열리는 시야, 지상을 딛고 걸을 때와는 달리 흔들리며 다가오는 율동적인 산하의 아름다움, 말의 등에서 배어 나오는 따스한 감촉….
세상은 한순간에 금방 달라진다.
나그네는 이제 모든 피로도 잊고 동화 속의 왕자처럼 유유자적 말의 등에 올라 광야를 건넌다.
× ×
나는 앞에서 나그네와 말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그네와 말을 시인과 시의 관계로 바꾸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인들은 광야를 걸어가는 외로운 나그네, 시는 광야에 버려진 수척한 말에 비유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나그네가 겪는 것처럼 시인들도 세 가지 단계를 겪어 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은 말을 끌지만 말에 끌려가듯 시를 쓰지만 시에 끌려가는 단계입니다.
다음은 말과 친구가 되어 동행하듯 시와 동고동락하며 지내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은 말 위에 올라타고 가듯 시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첫째는 시인이 시를 이기지 못하고 시에게 눌려지내는 처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를 쓰는 일이 오히려 괴롭습니다.
늘 시를 생각하기는 하지만 시가 쉽게 쓰여지지 않습니다.
습작기의 시인들이 대개 겪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과정을 시를 찾는 멱시(覓詩)―시에 얽매이는 결박의 단계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인고와 연단의 대결을 통해 시의 결박으로부터 풀려나면 둘째의 과정인 친화의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여기서는 시와의 대결이 아니라 화해를 맞게 됩니다.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온을 맛보게 됩니다.
시와 함께 하는 일이 이젠 괴롭지 않습니다.
이 단계를 시를 터득하게 되는 견시(見詩)의 경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셋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말을 올라타고 시를 몰고 갑니다.
시 위에 올라타고 가니 그가 밟은 대지는 다 시의 영토가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의 자유방임― 그러나 기존의 시법에 얽매이지 않지만 결코 탈선을 범하지 않고, 새로움을 꿈꾸지만 결코 아집과 교만에 빠지지 않는 유유자적입니다.
무애불기(無碍弗羈)― 무법의 경지라고나 할까요.
공자의 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로 설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단계를 역시(役詩)의 경지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그러니 첫 번째 멱시(覓詩)의 단계는 시인이 시의 시종(侍從)으로 매인 것이고,
두 번째 견시(見詩)의 단계는 시인과 시가 친구의 관계라고 한다면,
세 번째 역시(役詩)의 단계는 시인이 시의 주인이 되는 격입니다.
시는 한 마리의 말입니다.
오늘의 시인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그대는 시의 말을 어떻게 기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황금의 외양간을 지어 세상과는 담을 쌓고 시를 자신의 상전(上典)으로 떠받들며 봉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아직 허약한 그놈을 밖으로 내몰아 해동도 안 된 돌길에 무거운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시의 말은 상전으로 섬길 것도 못되며 그렇다고 하인처럼 혹사시킬 것도 아닙니다.
한 마리의 말을 잘 먹여 준마로 키워내듯 정성으로 잘 기른 다음 그놈의 등에 올라 유유자적 세상길을 넘을 일입니다.
지금 그대가 기른 시마(詩馬)는 어떠한가요?
올라타도 될 말큼 늠름한가요?
그럼 어서 올라타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