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새 카테고리

[스크랩] "처칠이 돌아왔다"

nimdouckyoung 2011. 1. 15. 08:33

히틀러가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에 나서게 된 데엔 영국 체임벌린 내각이 히틀러에게 유화(宥和)정책을 편 탓이 컸다. 1939년 폴란드에 이어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가 순식간에 독일 손아귀에 들어가자 주영(駐英) 미국대사 조지프 P 케네디는 "영국도 가망 없다"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협상에 매달리며 히틀러와의 전쟁을 피해 온 영국은 일전(一戰)을 치를 준비와 자세가 돼 있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할 수 없이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처칠은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부터 "유럽에 폭풍우가 몰려온다"며 나약한 정부와 국민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 예순네 살 처칠은 1차대전 때 이미 해군장관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히틀러와 싸우는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기용되자 영국 해군 병사들은 "원니(처칠의 애칭)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처칠은 "대가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1940년 5월 영국 국민은 처칠을 수상 자리에 올렸다. 처칠은 의회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단합된 우리 힘을 믿고 앞으로 나갑시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25명의 장관에게 "영국의 긴 역사가 끝내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면, 히틀러가 피 흘리고 숨이 막혀 죽은 뒤에야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처칠이 단호한 의지와 용기로 앞장서면서 영국은 달라졌다. 5년 뒤 히틀러의 나치는 무릎을 꿇었다.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길은 전쟁을 겁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1962년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미국의 숨통을 노리려 했다. 그 위기에서 미국을 지켜낸 것은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 해상을 봉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였다.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로 에워싸인 속에서 국가적 존엄을 유지하는 것도 어떤 침략과 위협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누구나 싫어한다. 그러나 침략에 무너져 나라가 없어지면 전쟁이 싫고 좋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엊그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분명 전쟁 도발이다. 거기에 대한 청와대와 군(軍)의 판단과 대응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죽고자 하면 살 것(必死則生)'이라는 결의로 국민의 뜻을 모아 위기를 헤쳐나갈 지도자상(像), 처칠을 떠올린다.

출처 : 714junny
글쓴이 : 영준(junny) 원글보기
메모 :